The Bible2010. 9. 25. 14:32
복음과상황(201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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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편집부 (복음과상황,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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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단어 중에 하나가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제 주위 사람들만 봐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양극화로 인한 빈부격차, 성별과 학력과 같은 문제들로 인한 차별들이 그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인생의 동반자처럼 동행하고 있는 상대적 박탈감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배부른 투정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땀 흘려 일을 해도 무언가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데서 오는 절망감의 다른 표현일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 박탈감은 보다나은 삶을 향한 열망의 연료로 사용되기 보다는, ‘땀 흘린 만큼 잘 사는 사회’라는 이 사회의 구호를 냉소하게 하고, 지금도 어딘가 어두운 방구석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삶에 눈물 흘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만큼 이 사회는 노력과 땀을 제대로 보상하고 평가하지 않는 병을 깊이 앓고 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의 사회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월급’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푸어’가 천 만명을 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데,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우리나라의 근로빈곤층이 209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도 연구자의 손에 잡힌 수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도 가난한 처지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워킹푸어, 곧 근로빈곤층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가 좀 어색하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찬란한 슬픔’처럼 모순된 두개의 단어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로와 빈곤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하나의 묶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시에서나 허용되는 표현들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 사회가 정상은 아닌 것입니다.


워킹푸어 뿐 아니라, 월급을 통해 볼 수 있는 이 사회의 박탈감 바이러스는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46%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대기업 신입사원은 3,138만원의 연봉을 받는데, 똑같이 공부하고 노력한 중소기업 신입사원은 2,01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성별에 따라서도 월급이 다른데, 얼마 전 우리나라 증권사 여직원들의 급여가 남직원들에 비해 평균 48.18%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 차별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요? 근로빈곤층, 비정규직, 중소기업 신입사원, 여직원들이 게으르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건물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많이 땀 흘리고, 가장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은 이 건물에서 가장 적은 돈을 손에 쥐는 용역회사에 고용된 청소부 아주머니들이라는 것만 봐도 그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최저임금은 무언가 잘못된 이 사회의 월급 시스템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결정한 한 달 최저임금은 90만 2880원, 시간당 4320원입니다. 이는 법정최고임금제도가 있는 OECD 21개국 중 17위에 해당합니다. 최저생계비는 잘 알고 계실테니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사용자 단체에서 이 최저임금을 10원 올리겠다는 제안을 해서 많은 지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00만원도 안되는,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너무나 벅찬 최저임금을 국가가 공인하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최저임금마저 받지 못하는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돈을 적게 받는다는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사회에 제대로 발도 들여놓기 전부터 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정직하게 땀흘려 일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스스로 체득하는 안타까운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지도 못했고, 좋은 학벌이 있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최저임금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바로 “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냥 ‘요모양 요꼴’로 살 것”이라는 조롱뿐입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하고, 고용형태와 출신학교 그리고 성별에 따라서 똑같은 노동에 다른 월급을 받고, 하루를 일해도 소고기 한 번 먹을 수 없는 최저임금을 국가가 책정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는 상대적 박탈감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저는 ‘성공이 하나밖에 없는 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두 다른 얼굴과 재능 그리고 꿈을 가지고 태어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개인은 물론, 사회는 각 사람들의 재능과 꿈을 키우는데 노력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런 다양한 인생이 다양한 성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아닙니다. 성공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입니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고달픔의 연속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갈 수 없는 곳에, 모든 풍요와 보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지요. 1%의 사람이 99%의 혜택을 누리는 보상체계가 이 사회의 임금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심각함을 체감하고 있는 교육의 문제도 ‘하나밖에 없는 성공’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각자가 가진 재능과 꿈대로 다양하게 인생을 꽃피울 수 없는 사회에서 모두가 똑같은 학교, 똑같은 직장을 향해 맹렬한 경쟁의 전투에서 분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두가 그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기에, 탈락한 사람들은 평생을 열등감과 사회적인 차별 속에서 인생의 패배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상대적 박탈감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로지 그것만이 성공의 길이기에 아빠는 오늘도 밤마다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눈물과 함께 삼키며 저 멀리에 있는 부인과 자식들에게 송금을 하고, 엄마는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까지 학원비를 대며, 아이들은 한창 뛰어놀 시기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학원차에 짐짝처럼 실려다니는 신세가 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것은 수많은 청소년의 자살과 가정 파괴, 그리고 공부는 잘하면서도 더불어 살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문학인들과 연예인들의 대부분이 기본적인 생활도 되지 않을 만큼의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뉴스를 종종 접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좋은 학교를 나온 좋은 기업의 임원들이 수십억의 급여를 받아간다는 뉴스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성공으로 인한 사회적 보상체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무엇보다 성공을 여러 가지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좋은 학교에 갈수도 없지만, 갈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대기업에 다닐 수도 없지만, 다닐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그래야만 사람 취급을 받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좁은 문을 향해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악순환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성공’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을 가는 것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 중에 하나가 되는 사회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삶을 살아도 그것이 각자의 재능과 지향에 따라 선택한 삶이라면 밥 굶는 걱정은 하지 않는 사회적 보상체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운동을 잘하는 사람의 재능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인정받는 사회의 모습을 저는 그려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월급 곧 ‘임금’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됩니다. 각자의 직업과 역할에 따라 받는 보상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름이 생존의 문제를 걱정해야할 만큼의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땀과 노력을 통해 더 좋은 인생을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소박한 생각이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괴물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최저임금을 현실화해서 어떤 일을 해도 삶을 꾸려 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다양 삶의 모습들이 보장되는, 그래서 다양한 개개인들의 삶을 통해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 기업가들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턱없는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나은 급여를 지급한다고 생색을 내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노동과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를 최저임금의 현실화를 통해 앞당겨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더 많은 월급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가치있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임금을 책정하는 기준과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왜 에어콘 바람으로 시원한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푹푹찌는 바깥에서 비 오듯 땀을 쏟아내며 일하는 사람들보다 월급을 더 받아야 할까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임금체계와 생각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여전히 우매했던 시대의 사농공상 차별 연장선상에 있는 임금체계에 대한 의심이 필요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사회적 제도로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풍요 그리고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는 효과를 동시에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임금체계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사회적 자원이 다양한 많은 사람들에게 분산되도록 하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월급’의 문제와 함께 다루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복지’입니다. 왜냐하면 월급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밑천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의료’, ‘교육’, ‘주거’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키워갈 수 있는 교육을 받고, 하루 동안의 성실한 삶을 편하게 누일 곳이 있어야 행복한 삶을 위한 기본적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본위에 자신의 노력을 통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는 무언가 더 많은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월급을 가지고 기본적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도 벅찬 것이 현실입니다. 당장 우리들의 지출명세서만 살펴보아도 의료비와 교육비 그리고 주거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복지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를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받은 월급을 더 나은 인생의 종자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이 사회는 기본적인 삶의 근거들을 보장하고 만족시켜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 사람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수많은 공무원들의 월급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에 그런 역할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얻어내야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설픈 이야기이지만, 이런 노력들이 현실로 이어질 때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눈물짓게 하는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들을 해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자신에게 있는 다양한 재능과 꿈들을 펼치는 다양성이 넘치는 사회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월급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차원으로 넓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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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적미소